매뉴얼의 가치에 대하여

매뉴얼을 읽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것이 사실에 가깝다. 매뉴얼이 우리 사회에서 중시되지 않는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무엇보다도 서비스 비용이 상대적으로 적게 든다. 밥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주부들은 다음의 방법들을 차례로 시도한다.

  • 남편에게 고쳐달라고 한다.
  • 콜 센터에 전화하여 증상을 설명한다. 운이 좋다면 문제가 해결된다. 그렇지 않다면 하루나 이틀 뒤에 수리 기사가 방문할 것이라는 답변을 듣는다.
  • 서비스 센터가 근처에 있다면 문제의 제품을 갖고 찾아간다.
  • 제조사에 문제의 제품을 보낸다. 일 주일 뒤에 수리된 제품을 돌려받는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그다지 많지 않다. 서구에서 수리 기사를 부르는 것은 신중을 요하는 일이다. 결함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경우에도 수리 기사에게 상당한 금액의 출장비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좁은 지역에 많은 사람들이 사는 한국에서 서비스에 필요한 인건비와 교통비는 쉽게 무시될 만큼 저렴하다. 이런 여건은 매뉴얼과 무관한 것 같지만 다음과 같은 상황을 고착시킨다.

  • 사용자들이 고장인지 아닌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서비스를 요청한다.
  • 사용자들이 제품을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관리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 매뉴얼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므로 기업들이 매뉴얼 개발에 투자하지 않는다.
  • 매뉴얼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므로, 사용자들이 제품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심지어 고장인지 아닌지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

서비스 비용이, 특히 인건비가 낮게 유지되는 동안에는 매뉴얼 개발에 투자하는 것은 어리석은 결정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서비스 비용이 점차 제품 가격의 상승을 압박할 만큼 증가하고 있다. 대안을 모색할 시점이 왔다.

외국 시장으로의 진출을 시도하는 기업들은 형편없는 매뉴얼이 걸림돌이 되는 상황에 당황한다. 바이어들은 놀랍게도 매뉴얼을 꼼꼼히 읽고 이것저것을 보태거나 고치기를 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매뉴얼 개발을 하찮은 일로 여기지만 예상과 달리 매뉴얼은 쉽게 개선되지 않는다. 제품 개발과 마찬가지로 경험 많은 전문가의 손길이 매뉴얼 개발에도 필요하다.
패트리샤 로빈슨(Patricia Robinson)은 그의 저서 매뉴얼 만들기(Writing and Designing Manuals)에서 이렇게 말한다.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아무도 매뉴얼을 읽지 않는다는 성급한 가정이 잘못된 것으로 나타났다. 사용자들은 더 좋은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문서 디자인 전문가인 카렌 슈라이버(Karen Schriver)는 제품 사용 실태를 연구하면서 인터뷰를 한 사람들 중에서 4%만이 매뉴얼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응답했고 나머지 96%는 사용한다고 대답했다고 밝혔다.

높은 서비스 비용의 부담이 서구에서 DIY (Do It Yourself) 문화를 발달시켰다. 서구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에 비해 매뉴얼에 크게 의존한다. 조립 가구를 취급하는 이케아가 한국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은 이 문화적 차이에 근거한다.

좋은 매뉴얼은 사용자에게 봉사한다. 사용자에게 올바른 사용 방법과 관리 방법을 알려준다. 결과적으로 기업은 콜 센터 운영비를 줄일 수 있다. 또한 좋은 매뉴얼은 사용자들에게 좋은 브랜드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이제 제조사들은 자신들이 파는 진짜 상품이 회사 브랜드임을 깨달았다. 매뉴얼은 제품의 일부이다. 매뉴얼이 부실하다면 제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도가 떨어질 것이다.

매뉴얼은 제조사도 봉사한다. 보증이나 결함을 두고 벌어지는 소비자와의 분쟁이나 소송에서 매뉴얼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매뉴얼은 제조사에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새로 입사한 직원들이 제품을 이해하는 데에 매뉴얼이 훌륭한 교재가 된다. 또한 매뉴얼은 역사적 기록물로서 제품의 변천을 보여줄 수 있다. 매뉴얼 개발에 투자하라. 분명 투자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